배움의 목적 " 우리는 영원한 학생이다"
2014. 05.23(금) 16:48
옛날에 사람이 죽으면 묘비에 ‘학생’이라는 말을 썼다. 필자를 예로 들면‘ 학생 인동장공동식지묘’라는 말을 새겨 넣었을 것이다. 여든이 넘어 죽은 사람도 스스로 학생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묻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요즘의‘ 학생’은 중?고등학교에다니거나, 길게 봐줘야 대학에 다니는 사람에게까지 붙이는 말이다. 그리고 박사과정 정도에 다니면‘ 선생’이라는 호칭을 듣는다. 요즘의 세태와는 많이 달랐던 것같다.

스스로를 학생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항상 무언가를 배우려고 할것이지만, 스스로를 선생이라고생각하는 사람은 배우기보다는가르치려고 들 것이다.“ 자기의정체(正體)를 학생에 두는 사람은복이 있으리니, 저의의 인격이 날로 성장할 것이요!” 예수의 팔복을 흉내내봤다.

공자는 스스로를 학생으로 규정한 사람이다.“ 나보다 훌륭한 사람은 많이 있을 것이지만, 나보다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호학?好學)은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그는 늙도록 스스로를배우는 자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배우는 것을 좋아해서 스스로를‘호학’(好學)이라고 했다.

과장이 있겠지만, 그는 제자들이3천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늘 가르치는 사람이었고, 주변에는 그에게 뭔가 하나라도 배우려는 사람이 들끓었지만, 그는 스스로를선생보다는 학생으로 여겼다. 배움이라는 것은‘ 타인을 위주로 하는것’(爲人之學)이 아니라‘ 자신을 위주로 하는 것, 즉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배움은 자신의 완성을 위한 것이지 타인에게 보이거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것은아니기 때문이다.

논어 위정(爲政)편 넷째 구절은우리가 너무나 많이 들어본 말이나온다.

“자왈 오십유오이지우학, 삼십이립, 사십이불혹, 오십이지천명,육십이이순,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子曰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내 나이열다섯에 배움에 뜻을 두었으며, 삼십에 섰고, 사십에 흔들리지 않았다. 오십에는 천명을 알았고, 육십에는 귀가 순해졌으며, 칠십에는 마음이 하고자하는 대로 따라해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학교에서 괄호 넣기 같은 시험문제로도 많이 나오는 구절이다. 이구절만 가지고도 두세 시간 정도의 강의가 필요하기에 여기서는이 글의 내용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 않겠다. 다만, 열다섯에 배움에뜻을 둔 그는 나이 일흔이 되어서 ‘하늘’이 되었다.“ 마음이 하고자하는 대로 따라 해도 법도를 넘지않았다”는 말은 내 욕망대로 행동한다고 하더라도 하늘의 뜻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내 욕망, 내 욕심, 내 마음이 곧 하늘의 마음이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내가 하늘이 되어야만 비로소 이 경지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내가 하늘이 되는 경지는 도대체 어떤 경지일까? 아마도석가가 말하는‘ 열반’(니르바나)의 경지거나, 인도철학에서 얘기하는‘ 해탈’(목샤), 예수가 말하는‘구원’(예수천당 불신지옥의 그천당이 아니다)의 경지, 혹은 노자가 말하는‘ 스스로 그러한’(自然)경지 정도 되지 않을까 감히 상상해본다.

공자는 사람이 하늘이 되는 길중의 하나를 개척했다. 석가가 명상이라는 길을, 예수가 믿음이라는 길을 개척했던 것처럼 그는 자신만의 길을 개척했다.‘ 배움과그것의 실천’이라는 길이다.

그래서 다시 논어의 제일 첫머리로 돌아간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고 하지 않았는가? 배우고 그것을 때맞춰 익힌다면, 그렇게 계속한다면,마침내 그 끝에서 하늘이 되고 말것이다. 배우고 익히는‘ 기쁨’은
바로 이런 기쁨이다.

독자들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학생인지 선생인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지우학’(志于學),곧 배움에 뜻을 두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간다면 완성에, 하늘에 이를 것이다. 이런 정도라면 배울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이유 말고 배워야 할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

장동식 | 지혜학교 교사

이 기사는 전라교육신문 홈페이지(http://www.jledu.co.kr)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cch8585@hanmail.net